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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개인적인 한국영화 감상노트
'광해, 왕이 된 남자(2012년)' 줄거리 및 감상 본문
감독: 추창민
출연: 이병헌, 류승룡, 한효주
개봉: 2012. 9월

조선
1392년 조선 왕조가 건국된 후, 크고 작은 국경 분쟁과 두 차례의 왕권 찬탈이 있었지만 조선은 비교적 안정적인 평화와 번영을 구가했다. ‘한글’이 창제되었고 각종 법령과 제도가 정비되었다. 유학을 바탕으로 한 국가이념도 자리를 잡아갔다.
건국 200년이 되는 1592년, 조선은 큰 전쟁에 휘말린다. 바로 신무기 조총으로 무장한 15만의 일본군이 바다를 건너 침략해온 것이다. ‘임진왜란’으로 알려진 이 전쟁은 무려 7년간 계속되었고, 조선은 국토도 정신도 만신창이가 되었다. 전쟁이 불리해지자 조선의 왕 선조는 국가 운영을 왕세자에게 맡기고 중국으로 망명을 시도하나 거절당한다. 왕세자는 전쟁에 지친 백성들을 위로하고 관군과 의병들을 격려하며 전 국토를 누비고 다녔다. 백성들은 왕의 도망에 분노하여 궁궐을 불태웠지만, 그들의 곁에 남아 위로하고 격려하는 왕세자에 대해서는 지지와 기대를 보냈다. 왕은 왕세자와 전쟁 영웅들의 인기를 왕위에 대한 잠재적인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용감하고 영민하였으나 생존을 위해 왕에게 끊임없이 충성을 증명해야 했던 왕세자의 이름이 바로 ‘광해’이다.
왕위에 오른 광해는 감당하기 어려운 과제들과 맞서야 했다. 전쟁으로 피폐화된 백성들의 삶과 국가를 재건해야 했고, 불타버린 궁궐도 다시 지어야 했다. 대륙의 떠오르는 강자인 후금(훗날 청나라)과 아슬아슬한 줄타기 외교를 해야 했지만 신하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그 와중에 부왕인 선조가 뒤늦게 생산한 직계 왕자를 등에 업은 세력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광해는 점점 의심이 많아졌고 배타적인 군주가 되어갔다. 이 영화는 그의 스트레스가 극도에 달한 집권 8년을 배경으로 시작한다.
* * *
“주상 전하를 뵈러 갈 것이다”
끊임없는 암살 위협에 예민해진 ‘광해(이병헌 분)’는 궁궐 내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오직 도승지 벼슬의 ‘허균(류승룡 분)’만이 그가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신하다. 광해는 허균에게 내렸던 명령이 어찌 진행되는지 은밀히 묻는다. 그 명령은 바로 자신과 똑같이 생긴 자를 찾아오라는 것이었다.
이 즈음 조정은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진주부사를 처형하라는 신하들과 유생들의 주장으로 가득하다. 허균은 죄가 드러난 후에 처형해도 늦지 않다며 홀로 반대하지만 신하들은 이미 광해의 충신들을 숙청하려는 반대 당파로 가득한 상태이다. 광해는 진주부사가 중전의 오빠이며 강직한 충신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정도 측근을 내어줘야 반대파 신하들을 달랠 수 있다고 계산할 만큼 냉혹한 모습도 보인다.

* * *
유학(儒學)이 국가이념인 조선에서 왕은 절대군주가 아니라 신하들 및 학자들과 끊임없는 협조와 갈등 속에 국정을 운영하는 지도자였다. 조선의 지배층인 양반(사대부) 계급은 유학의 이념에 맞는 왕이 아니라고 판단이 되면 왕을 강제로 폐위할 수 있는 명분이 있었고 그것이 용인되던 나라인 것이다. 그 이념을 어떻게 해석하고 현실에서 구현하느냐에 대한 입장 차이로 당파가 나뉘어졌는데, 조선 왕조 내내 당파 간의 격렬한 정쟁이 계속된다. 정쟁은 실로 격렬하여 반대 세력의 정치적인 실각에 그치지 않고 가문 모두까지 말살하는 투쟁으로 극단화된다. 광해 역시 훗날 이러한 반대 세력에 의해 왕좌에서 축출되는 운명을 맞는다.
* * *
하선(이병헌 분)은 기루에서 양반들의 술자리의 흥을 돋우는 광대인데, 특히 왕을 가장한 음란한 만담으로 인기를 끌었다. 그러다가 하선은 왕과 똑같이 생긴 자를 찾던 허균에게 발견된다. 허균은 하선이 왕과 똑같이 생겼을 뿐 아니라 체격까지 비슷함을 확인하자 은밀하게 하선을 왕 앞으로 데려간다. 하선이 왕의 외모뿐 아니라 말투까지 그럴 듯하게 흉내내자, 광해는 크게 만족하고 하선에게 왕의 옷을 입힌 후 하룻밤 그를 대행하게 한다. 그날 밤 이후, 하선에게는 사흘에 한번 왕의 대행을 위해 대기하라는 명령이 내려진다. 이 비밀을 지키는 사람은 왕인 광해와 측근인 허균, 그리고 왕을 보필하는 수석내관 상선(장광 분)과 호위대장 도부장(김인권 분) 이렇게 네 사람뿐이다.
“그저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될 것이야”
어느 날, 광해가 정체모를 독으로 인해 쓰러져 의식을 잃는다. 허균은 급히 하선을 궁으로 데려오게 하는 한편, 광해를 모처로 이송하여 치료하게 한다. 왕이 쓰러졌다는 사실을 비밀로 하여 독을 쓴 자들의 정체를 밝히고 광해가 회복할 시간을 벌고자 하는 이유였다. 하룻밤 동안 자리를 지키고만 있어도 두둑한 돈을 받던 하선은 졸지에 진짜 왕 역할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궁궐의 예법도를 알 리 없는 하선에게 허균은 왕실 인물과 신하들 정보부터 왕의 일상, 정무처리까지 속성으로 가르친다. 특히 중전(한효주 분)과는 절대 마주치지 말 것을 당부한다. 하선은 허균의 가르침과 수석내관의 조언으로 조금씩 궁궐 생활에 적응해간다. 그는 왕을 모시는 이들의 고단함을 알게 되고, 아울러 암중으로 갈등과 견제 관계인 신하들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
드디어, 하선이 광해의 모습으로 신하들과 첫 대면을 하는 날, 허균의 의도가 담긴 교지가 광해의 뜻인양 발표되면서 조정은 발칵 뒤집힌다. 양반들의 가장 예민한 이슈였던 호패법과 대동법의 실시가 전격적으로 발표되고, 반대파들이 숙청하고자 했던 진주부사에 대한 처벌논의를 금지시킨 것이다.

* * *
호패법은 만 16세 이상 남성에게 일종의 신분증인 ‘호패’를 발급하는 제도이다. 이를 통해 국가는 정확한 인구를 파악할 수 있었고, 세금과 병역도 체계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다. 호패법은 원래 조선 건국 초기부터 시행되었으나 정착이 쉽지 않았다. 호패가 발급되면 세금, 군역 등에 동원되지만 양반과 노비는 제외되었다. 그래서 일부 백성들은 부담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양반의 노비가 되는 일도 적지 않았다. 호패법의 엄격한 시행은 자발적인 노비 창출의 길을 막기 때문에 양반의 입장에서도 달갑지 않은 이슈였다.
대동법은 세금을 각 지역의 특산품에서 곡식으로 통일시키는 법이다. 백성들이 삶에서 구할 수 있는 물품으로 세금을 대신하는 것은 이론적으론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지역과 전혀 상관없는 특산물이 배정되기도 하고 특정 상인이 품목과 거래를 독점하여 과도한 이문을 남기는 등의 폐해가 심각하였다. 결국 이러한 세금 제도는 가난한 백성들에게 빚의 굴레에 빠지게 하여 자식을 팔거나 터전을 버리고 도망가게 만드는 큰 이유가 되었다. 대동법은 실제로 광해 시절에 처음 시범적으로 실시되어 차츰 확대되었다.
무엇보다도 당시 조선은 일본과의 7년 전쟁으로 농토의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많은 백성들이 죽거나 유랑민이 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정확한 인구 집계와 엄격한 세금 제도가 꼭 필요한 상황이었다.
* * *
“어쩔 땐 나도 내가 진짜 임금같소”
하선은 궁의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조금씩 여유를 되찾는다. 식사를 맛있게 먹으며 하선은 문득 식사를 나르는 어린 궁녀의 이름과 나이를 묻는다. 어린 궁녀가 이름은 사월(심은경 분)이며 15세라고 답하자 하선은 잠시 멈칫한다. 하선이 궁궐에 들어오기 전, 15세의 어린 기녀가 현감의 욕망에 짓밟힌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후 하선은 사월이라는 어린 궁녀를 각별하게 챙긴다. 궁녀들은 왠지 모르게 밝고 친근하게 변한 왕의 분위기에 의아하면서도 그 변화를 반기며 즐거워한다.

한편, 진짜 광해가 쓰러진 이유가 독이 아니고 약(양귀비)임이 밝혀진다. 허균은 광해가 몰래 만나던 여인을 의심하지만, 이미 반대파에 의해 여인과 증거물은 모두 제거된 후다. 반대파들은 왕이 어쩐 일인지 요청하는 사안들 모두 허락한다는 점을 눈치채고 대동법의 실시 유예와 진주부사에 대한 심문을 재개하는 승인을 얻어낸다. 허균이 뒤늦게 이를 알게 되었지만 이미 승인은 내려진 뒤다. 이 일은 하선이 호패법이나 대동법이 무엇인지 알기는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계기가 된다.
하선은 이제 제법 왕 행세에 익숙해져 수석내관과도 자주 농담을 나누며 낄낄거린다. 늦은 밤, 어린 궁녀 사월이가 야참을 들고 들어오자 하선은 예의 그 친근함으로 사월이의 입궁 사연을 묻는다. 사월이의 사연은 세금제도의 폐해에 시달린 백성들의 사연 그대로였다. 농사꾼인 사월의 아비에게 해산물이 세금으로 배정되자 사월의 아버지는 빚을 내어 해산물을 사서 바쳐야 했다. 그 빚이 불어나 집과 땅을 헐값에 빼앗기고 결국 아버지는 감옥에 갇히고 어머니와 가족들은 노비로 뿔뿔이 팔려간 것이다. 사연을 들으면서 하선은 “어허, 저런…”, “이런 나쁜 놈들…”하고 탄식하며 눈물을 짓는다. 그리고는 사월이에게 꼭 어머니를 만나게 해주겠노라 약속한다.
다음날, 하선은 대전에 도열한 신하들에게 대동법의 조기 시행을 명한다. 일부 신하들이 반대하였지만 하선은 물러서지 않는다. 그는 백성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기존 세제를 대동법으로 대체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는다.

“이 자는 죄가 없다”
하선은 대동법의 시행을 강하게 밀어붙인 일을 허균이 칭찬하기를 은근히 기대했지만 오히려 뜻밖의 말을 듣는다. 허균은 대동법을 양보하고 진주부사를 살리려 한 것이다. 그제서야 진주부사가 중전의 오빠라는 사실을 알게 된 하선은 깜짝 놀란다. 하선이 그날 밤 잠을 쉽게 이루지 못하는데 갑자기 중전이 침소로 들이닥친다. 중전은 이불 아래 숨은 하선의 앞에 앉은 뒤, 차라리 자신에게 죽으라 하라며 품에서 작은 칼을 꺼내 목을 찌르려 한다. 깜짝 놀란 하선이 뛰쳐나가 중전에게서 칼을 빼앗은 뒤 무슨 일이 있어도 중전의 오빠를 살리겠노라 약속하고 만다.
날이 밝자 하선은 잡혀온 진주부사가 고문받고 있는 심문장으로 직접 찾아간다. 그리고 만신창이가 된 진주부사의 앞에서 직접 묻는다. 그리고 진주부사가 한 일은 반역을 꾀하거나 군사를 모은 일이 아니라 왕에게 끊임없이 간언한 것 외엔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선은 충신의 간언마저 왕에게 반항하는 역적으로 몰아 죽이려 하는 반대파 신하들의 행태에 울컥한다. 하선은 모두의 앞에서 진주부사를 풀어주라 명한다.
하지만 대동법에 이어 전격적으로 진행된 진주부사의 사면은 반대파를 더욱 긴장하게 만들고 왕과 허균을 파멸시킬 결심을 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한번 웃어보시오”
중전의 오빠를 살린 뿌듯함에 중전을 만나려 마음먹은 하선은 모든 수행원들을 물러가게 한다. 상선을 비롯한 모든 수행원들이 왕의 명령에 물러났지만, 왕의 명령보단 궁중의 법도를 먼저 앞세운 호위대장 도부장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도부장은 뛰어난 무예실력과 감각을 지녔으나 왕실의 호위와 궁궐의 법도를 무엇보다도 중요시하는 고집을 가진 무관이다. 하선은 도부장을 떼어놓기 위해 신발을 담장 밖으로 멀리 던져버린다. 깜짝 놀란 도부장이 날아간 신발을 찾으러 뛰어가자 하선은 그 틈에 중전의 처소로 급하게 달린다.
중전은 상궁에게 오빠인 진주부사가 정말로 풀려났다는 사실을 전해 듣는다. 상궁은 또 중전에게 왕이 요즘 웃는 일도 많고 정무에만 힘쓰는 등 달라졌다는 말도 전한다. 그러던 중 중전은 하선이 찾아온 것을 알고 마주한다. 하선은 중전을 웃기려 광대 시절에 쓰던 기술을 선보이는데 얼음장 같은 중전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다.
하선은 중전의 무반응에 잠시 멋쩍어하는데 멀리서 도부장이 왕을 찾아 달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하선은 순간적으로 중전을 끌어 감싸며 담장 아래로 몸을 낮춰 숨는다. 깜짝 놀란 중전에게 하선은 자신이 약속을 지켰으니 한가지 부탁을 들어달라고 말한다. 그 부탁이란 것은 바로 “한번 웃어보시오” 라는 것이다. 당황한 중전이 어찌할 바 몰라 하는데 마침 그 순간 도부장이 달려와 곤란한 상황을 피한다.
도부장이 무릎을 꿇고 찾아온 신발을 하선에게 신겨주던 중, 예리한 그의 눈길이 왕의 손에 멈춘다. 왕의 손이라기엔 너무도 거칠고 투박한 손이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도부장은 은밀히 상선을 찾아가 요즘 왕이 이상하다고 말하는데 상선은 ‘요즘 생각이 많으신가 봅니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도부장을 안심시킨다. 다음날 상선은 허균을 찾아가 차라리 도부장에게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 어떻겠느냐 묻지만 허균은 도부장이 고지식하기 짝이 없어 알리지 않는 게 좋다고 답한다.
하선은 사월이를 시켜 중전에게 팥죽을 보내며 힘을 내라는 말을 전하고, 중전은 오랜만에 느끼는 왕의 따뜻한 마음에 미소를 짓는다. 중전은 다시 사월이에게 밤이 되면 후원에서 만나자는 말을 하선에게 전하게 한다. 하선은 설레는 마음으로 중전에게 들려줄 시 한 편을 열심히 외우며 밤을 기다린다.
* * *
이 즈음에서 한가지 눈에 띄는 장면이 있다. 하선이 광해의 역할을 해내는 데 있어서는 허균이 밤마다 다음날 일정과 할 일을 세세히 알려준 덕분인데 그 장면마다 늘 허균이 상석에 앉고 하선은 그 앞에 무릎꿇고 앉는다. 그러나 진주부사를 풀어준 사건이 있은 다음에는 허균이 상석을 앉지 않고 신하의 자리에 앉는다. 사월이의 등장에 두 사람이 후다닥 자리를 바꾸었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제자리로 바꾸는 장면은 단순한 유머코드가 아니다. 얼음장 같던 중전의 마음이 조금씩 풀리고, 상선이 점점 하선에 대해 우호적이 되어가는 것처럼 허균도 하선의 돌발적인 결정들에 무의식적으로 존중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치가 아닐까 생각한다.
하선이 보여주는 모습은 특별한 모습이 아니다. 더 가진 사람이 더 많은 세금을 내는 것이 당연하고, 백성들의 삶이 나아지도록 제도를 시행하며, 억울하고 가엾은 사연에 함께 슬퍼하며 위로하고, 충신의 간언을 죄로 삼지 않는 것, 말 그대로 상식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백성들의 고통과 피땀 위에서 안락함과 권력을 유지하는 지배계급은 그 상식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특권은 당연한 것이며 상식은 반역의 사상인 것이다. 바로 엘리트주의다.
엘리트주의는 모습만 바뀌어 21세기 지금도 세계 곳곳에 만연하다. 기울어진 운동장, 끊어진 사다리, 부와 권력의 대물림, 정치와 경제와 폭력의 담합, 자본에 종속된 언론, 그러한 구조를 지키고 재생산하는데 최적화된 교육과 사법 방패… 그 속에서 공존과 생명의 가치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하지만 세상은 또한 생명의 가치가 소중함을, 그 가치를 지키는 싸움이 정의로움을 끊임없이 말한다. 이 영화처럼.
* * *
“나도 함께 폐위시키라”
궁궐에 신하들과 유생들이 또다시 모여들어 하선에게 압박을 가한다. 역모 구설수가 끊이지 않는 것은 중전 때문이므로 중전을 폐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하선은 단호하게 거부한다. 중전이 같은 당파가 아니라서 폐하려 한다면 자신 또한 같은 당파가 아니므로 폐위시켜 보라며 일갈한다. 하선의 앞길을 엎드려 막고 중전을 폐하라 외치는 수많은 유생들, 비켜서라는 하선의 호통에도 그들은 차라리 자신들을 짓밟고 가라며 요지부동이다.
유생들에 둘러쌓여 분노에 몸을 떨던 하선의 눈에 멀리 중전의 모습이 들어온다. 중전은 이 모든 장면을 덤덤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린다. 이들의 세력이 너무 강대하여, 섣불리 맞서면 왕도 위험하다는 것을 알기에 중전은 스스로의 운명을 체념한 것이다.
그 때, 모두가 깜짝 놀랄만한 일이 벌어진다. 하선이 자신들을 짓밟고 가라며 막아서는 유생들의 등을 정말로 돌다리처럼 밟아 넘으며 중전에게 뛰어오는 것이다. 하선은 놀란 중전의 손을 붙잡고 따라오는 신하들을 따돌리며 달린다. 그렇게 달리는 그들의 마음은 슬프고 쓸쓸하다.
‘어디로 가시옵니까’
‘나도 모르오’
‘이러지 마십시오. 그래봐야 궁 안입니다’
‘차라리 궁을 나가시오. 잠시 몸을 숨겼다가 떠나면 그 뿐이오’


한편, 정신을 잃은 광해가 15일 만에 깨어난다. 광해는 허균으로부터 반대파의 은밀한 미인계로 자신이 쓰러졌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지지세력이 미약한 광해는 반대파에 대한 척결을 미루고 먼저 자신의 행세를 하는 광대를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허균을 은밀하게 감시하던 반대파들도 왕이 가짜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기 시작한다. 마침내 중전마저 하선이 가짜 왕이란 사실을 알게 되고 하선이 궁궐을 떠나야 하는 날이 다가온다.
“부끄러운 줄 아시오”
하선이 궁궐을 떠나야 하는 날, 그가 마지막 왕 노릇을 위해 어좌에 앉는다. 전날 허균이 알려준 대로 하선은 신하들이 보고하는 정책을 모두 승인하려 한다. 그런데 신하들이 보고하는 정책을 듣던 하선은 점차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명나라에 보낼 막대한 공물, 사신에게 주는 선물, 2만명의 군사 파병, 명나라 황실에 보낼 생일선물…. 나라의 현실과 백성들의 삶은 안중에도 없는 그들에게 하선은 그만 폭발하고 만다.
“적당히들 하시오, 적당히들! 대체 이 나라가 누구 나라요? 뭐라, 이 땅이 오랑캐에게 짓밟혀도 상관없다고? 명 황제가 그리 좋으시면, 나라를 통째로 갖다 바치시든가!”
하선은 백성들의 목숨은 아랑곳하지 않는 신하들에게 분노를 감추지 못한다.
“그깟 사대의 명분이 뭐요? 도대체 뭐길래 2만의 백성들을 사지로 내몰라는 것이오? 임금이라면, 백성들이 지아비라 부르는 왕이라면! 빼앗고, 훔치고, 빌어먹을 지언정! 내 그들을 살려야겠소. 그대들이 죽고 못사는 사대의 예보다, 내 나라 내 백성이 열 갑절 백 갑절은 더 소중하오!”
하선의 격한 말에 신하들은 모두 말을 잃고, 허균은 잠시 놀라운 눈빛으로 하선을 쳐다본 뒤 깊은 생각에 잠긴다. 부복한 상선의 얼굴에는 남몰래 흐뭇한 표정이 떠오른다. .

* * *
아무리 혁신적이고 진보적인 사상과 시스템일지라도 맹목적으로 따르기만 한다면 오히려 발전을 가로막는 족쇄가 된다. 조선을 세운 이념적 기반이었던 유학 역시 진보적인 사상이었다. 하지만 그 진보적이던 유학도 200년이 흐르며 절대불변의 교리로 굳어졌다. 그 결과 조선은 현실과 동떨어진 사상 자체를 숭배하며 사대주의라는 수렁에 빠지게 된다.
사대 혹은 사대주의란 강대국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며 절대시하는 자세 혹은 사상이다. 유학의 나라 조선의 지배층인 양반은 부모와 자식, 양반과 천민, 남성과 여성 등 수직적인 질서가 무엇보다도 중요하였고 각각은 각자의 자리와 역할이 정해져 있다고 믿었다. 또한 질서, 의리, 은혜, 절개, 순종과도 같은 가치가 추앙받았다. 조선에게 명나라는 유학이라는 사상을 낳은 공자의 나라였고 더욱이 임진왜란때 원군을 보내 조선을 구한 나라였다. 조선의 유학자들에게 명나라는 그야말로 부모의 나라인 것이다. 부모가 아무리 못나도 자식은 무조건 부모를 옳다고 믿고 따르는 것이 당연한 이치였고 그러지 않으면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는 나라가 당시의 조선이었다. 내가 죽더라도 은혜를 베푼 상대에겐 모든 걸 바쳐 갚는 것이 사람된 도리이고 예절이라는 유교적 사상이, 특히 외교로 나타난 것이 바로 사대이다.
* * *
“말해라. 내가 임금이다”
식사시간이 되어 사월이를 비롯한 많은 수라간의 궁녀들이 식사를 대령한다. 마지막으로 먹는 궁궐의 식사라 그런지 하선은 즐겁게 식사하며 음식 맛을 칭찬한다. 그러나 사월은 유난히 긴장하는 모습으로 몸을 떨고 있다. 하선이 의아하여 사월을 조심스레 부르자 사월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왕을 올려다본다.
“마마, 부디 강녕하시옵소서”
그 말을 마친 사월은 갑자기 벌컥 하고 피를 내뿜으며 쓰러진다. 광해의 반대파가 식사에 독을 넣을 것을 강요하였으나 사월은 그 독을 대신 삼킨 것이다. 소스라치게 놀란 하선이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직접 사월을 들쳐안고 궁궐내 의원들에게 버선발로 뛰어간다. 그러나 사월은 끝내 눈을 감고 하선은 오열한다.

잠시 뒤 눈물을 삼킨 하선은 몸을 일으켜 배후를 즉시 체포하란 명을 내린다. 허균이 급히 만류하지만 하선은 저항할 경우 그 자리에서 목을 치라는 단호한 명령을 내린다. 독을 쓴 주모자가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는 시각, 반대 당파의 신하들은 모임을 갖고 대책을 논의한다. 그 자리에서 뜻밖에도 왕이 가짜라는 증거가 밝혀지고, 마침내 그들은 반격을 위한 군사행동을 시작한다. 하선이 왕 행세를 마치고 궁궐을 나가야 하는 날 밤, 이렇게 궁궐은 피바람이 불고 긴장감이 감돈다.
“나는 왕이 되고 싶소이다”
어둠에 잠긴 텅 빈 대전에서 허균과 하선은 나란히 서 있다. 허균은 곧 군사들이 들이닥칠 것이라며 하선에게 속히 궁궐을 벗어나라 말한다. 이 순간 허균의 말투는 그동안의 천민 광대에게 하던 하대가 아니라 존대로 바뀌어 있다. 하선은 단호한 표정으로 말한다.
“싫소. 내 이제껏 비루하게 살아왔지만 이제는 아니오. 사월이를 죽인 자들을 벌하지 않고서는 한 발자국도 못움직이겠소.”
그런 하선을 가만히 지켜보던 허균이 천천히,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허면…. 진짜 왕이 되시던가”
이어 허균은 힘주어 말한다.
“사월이란 아이의 복수를 하고 싶다면! 백성의 고혈을 빠는 저들을 용서치 못하겠다면! 백성을 하늘처럼 섬기는 왕, 진정 그것이 그대가 꿈꾸는 왕이라면! 그 꿈, 내가 이루어 드리리다.”
하선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허균을 바라본다. 허균의 표정도 죽음을 각오한 듯 단호하다. 하선은 눈을 돌려 텅 빈 황금빛 어좌를 바라본다. 두 사람은 어두운 달빛이 비치는 대전 밖을 배경으로 나란히 어좌를 바라본다. 그리고 하선이 천천히 말한다.
“나는…. 왕이 되고 싶소이다.”

그 시각 가짜 왕을 잡기 위한 군대가 궁궐로 몰려오고 있다..
▶ ▶ ▶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이하 결말은 생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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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이야기 대부분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허구이다. 조선의 15대 왕이었던 광해는 훨씬 복합적인 인물이었고, 영화처럼 누군가 왕을 대신했다는 기록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허균이란 인물도 광해 시절에 실존한 인물이고 사회모순을 비판하던 진보적 사상가였지만, 그가 광해의 최측근으로 보좌한 것까지는 아니다. 영화에선 그의 개혁적인 성향을 새롭게 재해석하여 등장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허구는 역사적 사실 여부보다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권력은 무엇을 지키기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 왕이란 어떠해야 하는가’
왕관을 쓰고 왕좌에 앉아 있다고 해서 모두 왕인 것은 아니다. 백성들의 삶을 먼저 생각하고, 억울한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잘못된 제도와 관행에 맞설 용기를 가진 사람이라면 비록 비천한 광대일지라도 진정한 왕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시대갸 바뀌고 나라가 달라도 권력과 정치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광해, 왕이 된 남자>는 조선의 왕을 이야기하면서도 결국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지도자의 책임과 정치의 본질을 고민하게 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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